새로 사귄 작은 친구 “야마하 리페이스”
피아노를 치는 사람으로써, 기타들을 동경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. 음을 구부정하게 하는 ‘벤딩’ 주법이 가능하고, 휴대할 수 있고, 작은 벽돌 같은 이펙터들로 톤을 멋지게 잡을 수 있다. 그리고 마지막으로 ‘티’를 낼 수 있다는 점. 기타 케이스를 메고 한 손에는 이펙터 가방에… 멀리서부터 음악하는 티가 철철 난다.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분신 같은 악기가 하나씩 있다. 갑부들이 자동차를 집 안에 줄 세우듯이 악기를 여러 개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. 나도 하나 있다. 시간이 지날 수록 주변 사람들의 장비는 업그레이드 되어 가지만, 크게 욕심은 없었다.
지난 여름, 일본에 다녀왔다.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일본 사람들은 악기를 잘 만든다. 중고악기를 사고 파는 것도 잘되어있다. 이번에 방문했던 오사카는 동경과는 다르게 키보드 종류가 많지 않다. 다음날 또 악기를 보러가자는 친구들을 따라 약간 시무룩한 채로 이번에는 지하철을 타고 좀 멀리 갔다. (사실 구경할 게 없는 나 때문에 그런거긴 했다.)
큰 백화점 한 층에 악기점들이 다 모여 있었다.
전날에는 보지 못한 종류의 키보드들이 많이 있었다.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.
(오른쪽부터) 키타. keyboard + Guitar / 아날로그 신스. 아는 게 별로 없어서 할 말이 없다.
/ 오르간 + 건반. 아이디어는 재밌지만 오르간 소리가 아쉽다. 따로 따로 잘 만드는 게 더 좋은 것 같다.
한 세 바퀴쯤 돌고 더 눈에 들어오는 게 없어서, 세 번이나 지나친 작은 건반 쪽으로 가봤다.
푸핫 무슨 장난감도 아니고 재밌게 생겼다. 자세히 보니 오르간이었다. 약간 입문용? 보급형 오르간 처럼 보였다. 야마하가 장난감 키보드도 만드는구나.
오잉? 소리가 꽤 괜찮은데? 구석구석 살펴보니 있을만한 건 다 있었다. 볼륨, 옥타브(건반갯수가 작으니까), Draw Bar 라고 오르간의 톤을 만드는 핵심적인 기능, 리버도 있고, 70년대 레드 제플린 같은 하드락에서 쓰일만한 디스토션도 있었다. 처음엔 이 지루한 백화점에서 시간 떼우기 좋다고 생각했다. 그런데 점점 갖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. 이름이 뭐라고? ‘Yamaha Reface’. 그 위에 같은 모델의 다른 키보드들이 있었다. 빈티지 일렉피아노, 다른 종류의 두 가지 신디사이저. 총 4가지의 건반이 있었다. 정말 맘에 들었다.
마치 펜더 로즈 건반을 연상시키는 음색과 디자인
악기 종류마다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다.
디자인은 심플한데, 톤이 죽인다. 눈 감고 들으면 정말로 고가의 소리가 난다. 과장이 아니라 이렇게 마음에 드는 톤은 처음이다.
내장 스피커가 있고 건전지로도 작동된다. +키타처럼 쓸 수 있는 스트랩 키트를 별도로 판다.
오르간(YC) : 새빨간 배경, 장난감 같은 노랑초록의 스위치들, 한 칸씩 오르락 내리락 할 때마다 뚝뚝 끊기는 느낌이 드는 페이더.
빈티지 EP(CP) : 모던한 검정색 배경, 노브가 달려있는 곳에는 은색으로 되어있어서 진짜 빈티지 EP 디자인을 구현한 느낌이 든다. 총 6개의 음색과, EP에서 자주 쓰이는 이펙트들이 있다.
신디사이저CS) : 깔끔한 흰 색 배경. 나같은 신스 초짜들부터 고수들까지, 가리지 않고 쓸 수 있는 인터페이스.
신디사이저(DX) : 빈티지 키보드랑은 또 다른 느낌의 블랙. CS 모델과 방식이 다른 신디사이저, 터치가 되고 미디전공 뿐만 아니라 건반 치는 사람들도 EP 쓸 수 있어보인다.
아쉽게도 돈도 베짱도 없어서 사진 못했다. 다음을 기약하며 쿨하게 야마하 리페이스를 보내주었다. 그런데… 생각보다 후유증이 심했다. 여행 내내 리페이스 얘기만 하고, 내 유튜브는 리페이스로 가득 차버렸다. 처음으로 정말 갖고 싶은 악기가 생겨버렸다. 인터넷에서 무료로 배포하는 야먀하 리페이스 사용설명서를 찾아 다운받고 수차례를 읽으며 입맛을 다셔야 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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(과정생략) 결국 샀다. 한국에서.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하니 220V 전원잭을 줬다. 돼지코 없이 한국에서 쓸 수 있게 되어 잘됐다. 스트랩 키트와 리페이스 전용 가방까지 알뜰하게 사서 나는 이제 기타들이 부럽지가 않다. 스트랩을 달고 건전지를 끼워서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. 내 방에는 지금 두 개의 리페이스가 있다. 오르간, 빈티지 EP. 요즘 공연과 버스킹에서 쏠쏠하게 쓰고 있다. 그리고 얼마 전에 끝난 예영싱 첫 콘서트에서도 멋지게 선보였다.
최근 LeeJoy 에릭스펍 공연에서 빨간색 오르간을 개시했다.
Yamaha Reface. 야먀하의 새로운 얼굴? 새로운 방향성 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. 야마하의 이런 방향성이 정말 좋다고 생각한다. 정보도 자원도 뭐든지 풍부해진다. 기술의 발전은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. 과거와는 다르게 이제는 휴대폰이든 악기든 뭐든지 상상한대로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. 무수한 선택지 속에서 ‘사람 중심’으로 방향을 잡다니. 함께 진열되어있던 다른 번쩍번쩍한 피아노들 사이에서 그 조그만 키보드가 눈에 띌 수 밖에 없었다. 앞으로 이 작은 키보드의 활약을 기대해주길 바란다.
p.s. 생각해보니 내 멜로디언도 야마하였다. (이거↓)
나도 하나 가지고 싶다!! 으윽